기묘가족 奇妙家族: 가장의 부재
The Absence of Paterfamilias서로 이상하리만치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전연 다른 매체를 통해 인간적 갈등의 근원으로서 가족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두작가의 작품에서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폭력과 대화의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가 흥미로운 변주를 이룬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묘하지만 가장 진실된 모습일지 모를 가족의 초상에 접근하는 두 작가의 서로 다른 방식을 대조해 볼 수 있다. 한국과 벨기에라는 다른 문화권에서 각각 회화와 인터랙티브 영화라는 매체를 사용하는 두 작가는 가족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설명하는 데 성화聖畵의 상징을 차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두 작가 모두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을 소재로 사회 시스템의 모순에 기인하는 현대인의 불안에 대해 말한다. 이를 통해 가장 친밀한 인간 관계에 만연한 폭력과 소통의 단절은 갈등과 분노, 조소, 당황 등의 부정적 감정과 상황으로 드러난다.
베르하스트의 작품 정지된 시간Temps Mort/Idle Times은 가장家長의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의 직후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대본을 바탕으로 한다. 스토리텔러인 안젤로를 포함한 가족의 공동 초상을 담은 저녁 식사The Dinner와 이들의 개인 초상을 그린 다섯 개의 연작인 인물연구Character Studies, 그리고 다섯 점의 정물화인 테이블 소품Table Props으로 구성된 작품 정지된 시간은 등장인물 내면의 감정적인 동요를 섬세하게 포착하며 남은 유가족들이 적절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순간을 담았다. 개인의 초상에서 가족의 초상으로, 다시 이들 내면의 알레고리인 정물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복합적인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조문기의 작품은 가족 구성원간에 느껴지는 모호한 애증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 낸다. 가장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재산 다툼을 그린 상주와 함께The House of Mourning는 가족간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단순히 허상일지 모른다는 냉소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에서 폭력은 한 개인에게 특정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기를 강요하는 세계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며, 동시에 몰개성의 세계에 맞선 개인의 반동적 저항이기도 하다. 그의 회화적 기법은 작품 속 인물들에게 사라저 버릴 유령같은 베르하스트의 인물과는 대조적인 바위와 같은 무거운 존재감을 부여한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텍스처의 인물들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체화한 존재이다. 물성만이 남은 채 동질화된 인물들이 조문기 작품에 특유한 고요함을 만들어 낸다. 이들에 의해 사랑과 기적을 의미하는 종교적 인물을 대체시키는 그의 작품은 가족의 사랑이라는 강제된 관념에 대한 조소와도 같다.
두 작가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어딘가 인간성을 결여하고 물성만 남은 듯한 인물을 그려 낸다. 이렇듯 고전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두 작가의 작품은 권위적 형식으로서의 종교화와 같은 모습을 한 채 거대한 이데올로기인 가족의 모습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주체를 소멸시키는 가족이라는 시스템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실존임을 보여 주듯, 두 작가의 작품은 결국 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기이한 가족의 초상으로 회귀한다.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서로 뒤엉켜 살을 맞대고 있는 조문기의 인물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상호간에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베르하스트의 인물들은 마치 서로의 모습을 염원하고 희구하는 듯 보인다.
<기묘가족奇妙家族: 가장의 부재> 전에서 고전 성화의 권위적 도상이 현대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재해석 되듯, 소통을 통해 통합을 갈망하는 한편 독립된 주체로 남고자 하는 모순된 욕구는 시대를 넘어서 계속되는 갈등이라는 점이 암시된다. 서로를 너무나 닮은 가족 간의 소통마저 불가능 한 것임이 밝혀졌을 때, 과연 우리는 그 누구라도, 타인을 이해 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는 어디까지 가까워질 수 있으며 어떻게 서로를 이해해야만 하는가? 가족의 해체에 따른 독립된 개인을 염원하면서도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프레임 안에 갇힌 두 작가의 인물들은 나와 타인의 반복되는 경계의 갈등에 대해 우리가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질문하는 듯하다.
알렉스 베르하스트 Alex Verhaest (1985 ~ ) 알렉스 베르하스트는 브뤼셀과 암스테르담에 기반한 멀티미디어 작가로 최신의 기술을 사용해서 예술작품의 서사적인 공간을 탐구하고 있다. 언어와 이야기를 분석하며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해 질문하고 인간과 기계의 공생관계에 대한 사색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작가이다. 작가는 벨기에 루셀라레(Roeselare) 출신으로 안트워프의 성 루카스 예술 아카데미(Sint Lucas School of Arts Antwerpen)에서 사진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사진과 회화의 시각적 특징을 빌려 특유의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의 멀티미디어 작품을 제작한다. 암스테르담 그림 갤러리(Grimm Gallery) 첫 개인전 외 2016년 베를린HKW(Haus der Kulturen der Welt)이나 2015년 독일 ZKM 미술관의 그룹전 등 여러 전시 경력이 있다. 또,전세계 여러 예술 축제와 공모전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 상파울루에서 열린 전자 언어 국제 축제(Electronic Language International Festival),벨기에 헨트에서 개최된 신기술 예술상 (New Technological Art Award), 일본의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신인상(Japan Media Arts Festival New Face Award), 오스트리아의 예술 축제 아르스 엘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의 골든 니카상(Golden Nica) 등의 수상을 받은바 있다.
조문기 CHO Moon Ki (1977 ~ ) 조문기는 인간관계가 갖는 모호한 본성에 주목하여 남성에게 요구되는 가부장적 태도를 비판하고, 이로인해 일상에 만연해진 폭력을 작품을 통해 재치있게 지적하는 작가이다. 인간관계의 원형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어로 ‘폭력’을 제시하고, 가족간의 불문율적 사랑이 일종의 강제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며, 기성 가족주의의 모순에 의문섞인 시선을 던지는 작품을 선보인다. 조문기는 중앙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06년 <이발소 맥주 달력>을 시작으로 2010년 <방관하는 일상>, 2013년 <와해의 계절>과 그 후속 전시였던 2014년 <와해의 기원> 등의 개인전과 2013년 세종 문화 회관 미술관의 <이것이 대중 미술이다>, 2013년 서울 시립 미술관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아마도 예술 공간 <은혜전(展)>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미술과 음악을 넘나들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